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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이야기/선수

'New icon' 나카타 히데토시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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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0일 피파온라인4 정기정검때 20icon 클래스가 출시했습니다.

 

출처 : 피파온라인4

 

피파온라인만 즐기신 분들, 일부 유저 분들은

"나카타가 누구길래 icon으로 나오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꺼라 생각합니다.

 

출처 : 피파18

사실 나카타 히데토시는 피파온라인4가 아닌 피파18때부터 러시아 월드컵 아이콘으로 출시가 되었습니다.

출시 당시 일부 유저들은 일본을 겨냥하여 출시를 한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도 일본을 겨냥하여 출시 된것은 일부 맞는거같지만,

그만큼 잘하기도 했고, 많은 아시아, 일본 선수들 중에 나카타가 선정되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일본 축구의 icon'나카타 히데토시가 누구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출처 : 게티이미지 코리아

 

나카타 히데토시 ( Nakata Hidetoshi )

1977년 1월 22일, 일본

 

현역시절 포지션 :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현역 시절 소속팀 :

벨마레 히라츠카 (1995~1998)

AC 페루자 (1998~2000)

AS 로마 (2000~2001)

파르마 FC (2000~2001)

볼로냐 FC 1909 (2004) (임대)

ACF 피오렌티나 (2004~2006)

볼턴 원더러스 FC (2005~2006) (임대)

 

 

 

 

 

나카타 히데토시는 1995년 18세의 나이로 벨마레 히라츠카(현 쇼난 벨마레)에서 데뷔했습니다.

나카타는 첫 시즌부터 갓 데뷔한 선수답지 않은 정확한 패스와 축구 센스를 보여주면서 주전 자리를 꿰찹니다.

또, 팀은 나카타의 활약으로 첫 아시아 컵 위너스컵에 우승하며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

1997년 5월 홍명보가 이적료 11억에 벨마레 히라츠카로 이적하면서 함께 뛰기도 했습니다.

 

 

 

 소속팀과 청소년 대표팀, 올림픽 대표팀에서 꾸준히 활약하던 나카타 히데토시는

1997년 5월 대한민국 상대로 첫 성인 대표팀에 데뷔했습니다.

이후, 나카타는 성인 대표팀에서 에이스로 자리잡았고,

프랑스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여

일본의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게 됩니다. 

 

이러한 활약에 나카타는 1997년 일본 올해의 선수상, 아시아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으며

J리그 베스트 11에도 오르게 됩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일본 대표선수로 기량을 발휘했던 나카타는

월드컵 이후, 세리에A 페루자에 입단합니다.

 

 

 

페루자에 입단한 나카타는 등번호 7번을 부여받으면서 큰 주목을 끌게됩니다.

 

 

나카타의 세리에A 데뷔전 상대는

전 시즌 세리에A 우승팀이자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했던 유벤투스였습니다.

당시 유벤투스에는 지단, 델피에로, 데샹 등등 대단한 선수들이 있던 팀이였습니다.

 

경기 결과. 팀은 4대3으로 졌지만

후반전 나카타는 2골을 넣으면서 엄청난 활약를 보여주었습니다.

 

나카타의 세리에A 데뷔 골

 

비슷한 위치에서 넣는 멀티골

 

이후, 페루자에서 센세이셔널한 확약을 보여준 나카타는

98/99시즌 10골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시즌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1998년 아시아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였고,

발롱도르 50인 후보에 오르게 됩니다.

 

 

 

99/00시즌 좋은 활약을 이어갔던 나카타는

2000년 1월 겨울 이적시장에서 이적료 2200만 유로(약 295억원)로 세리에A 명문 클럽인 AS로마로 이적합니다.

 

 

그러나 AS로마에는 같은 포지션인 이탈리아 간판 스타 프란체스코 토티가 있어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면서 조력자 역활을 했고, 공미에서 뛰던 페루자 시절의 기량만큼 보여주진 못했습니다.

나카타(왼)와 토티(오)

 

 

 

이후, 00/01시즌

토티에게 주전 자리를 뺏겼던 나카타는 완전히 입지를 잃게 되었지만

'유벤투스 킬러'답게 유벤투스전에서 골도 넣으면서 유벤투스의 세리에A우승을 저지하였고,

AS로마가 00/01시즌 세리에A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파르마 상대로 3대1로 이기면서 우승 확정 짓는 AS로마

 

그렇게 나카타는 아시아 최초로 스쿠데토를 차지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이 후, 자신이 토티에 밀려 뛸수 없다는걸 알았던 나카타는

2001년 여름 이적시장때 이적료 2600만 유로(약 350억원)이라는 거액으로 파르마로 이적합니다.

 

당시 약 350억이라는 이적료는 자신의 아시아 역대 이적료 기록을 갱신하였고,

손흥민선수가 토트넘으로 이적하면서 14년만에 새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출처 : 채널A 스포츠 동영상 캡쳐

손흥민선수가 토트넘 이적당시에도 약 410억원이라는 거액으로 이적했다고 하지만,

  2001년에 나카타의 350억원이라는 이적료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였습니다.

 

당시 나카타에게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던 파르마는 약 60억원이라는 연봉을 제시했고,

이 금액은 세리에A에서 연봉 랭킹 3위에 달하는 거액의 연봉이였습니다.

 

당시 델피에로, 부폰, 칸나바로 등이 같은 연봉을 받고있었고,

인자기, 루이 코스타, 쉐브첸코, 호나우두 보다 많은 연봉을 받게되었습니다.

 

파르마로 이적한 나카타는 다시 팀내 핵심선수로 발돋움했습니다.

 

나카타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은 리그에서 중위권이였지만.

컵대회인 코파 이탈리아에서 선전을 하며 결승에 진출하였고,

결승전 유벤투스 상대로도 나카타는 골을 넣으며 우승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01/02시즌이 끝나고, 나카타는 2002 한일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나카타의 활약으로 일본은 월드텁 첫 16강에 진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2002 월드컵 이후 나카타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월드컵 이후 파르마에 돌아온 나카타는 기량이 크게 하락하였고,

소속팀에서 자신의 선호 포지션인 중앙 미드필더가 아닌 윙어로 출전하면서

자신의 실력도 보여주지 못했으며 그로인해 감독과 전술적 견해 차로 불화가 생겼습니다.

 

 

 

결국 나카타는 겨울 이적시장에서 볼로냐 FC 1909로 임대 이적하게 됩니다.

나카타는 볼로냐에서 주전으로 뛰었지만, 여전히 기량은 올라오지 않았고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결국 2004년 7월 여름 이적시장에서 나카타는 AC 피오렌티나로 이적합니다.

하지만, 나카타는 기량이 떨어질대로 떨어져 전력 외 선수가 되었고,

다음해인 2005년 7월에 EPL 볼턴 원더러스 FC로 임대 이적합니다.

 

처음으로 잉글랜드 무대를 밟은 나카타는

세리에A보다 과격한 EPL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05/06시즌 21경기 1골에 그쳤지만 나카타는 볼턴 생활에 만족감을 나타냈고,

완전 이적을 하고 싶다는 잔류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영표(토트넘)와 나카타(볼턴)

하지만 당시 볼턴 감독이였던 샘 알라다이스 감독의 눈에 들지 못했으며

볼턴은 선수단 리빌딩에 나서면서 나카타가 설 곳은 없었습니다.

 

샘 알라다이스

 

 

 

05/06시즌이 끝난 뒤

2006 독일 월드컵.

일본은 호주, 크로아티아, 브라질이 있는 F조에서 무기력하게 16강 진출을 실패하고

나카타는 돌연 은퇴를 선언합니다.

 

당시 일본 축구계는 나카타의 은퇴 선언에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은퇴 후 나카타는 그라운드가 아닌 곳에서 종종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태국에서 무에타이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고, 패션 모델로  활동하기도 하며,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자선활동을 하고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했던 나카타 히데토시는

행복을 위해 축구를 했지만 많은 압박감 속에서 살아야 했기에 이른 나이에 은퇴를 결심한거 같습니다.

 

 

 

지금까지 '일본 축구의 icon' 나카타 히데토시를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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